『칼사사 게시판』 32416번
제 목:(아처) 누구에게나 신입생, 미숙한 사랑의 경험은 있다
올린이:achor (권아처 ) 99/05/10 23:57 읽음: 40 관련자료 있음(TL)
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
1996년 2월, 서태지는 'Good-Bye'를 남긴 채 유림회관에서
떠나갔고, 난 그 해 3월, 유림회관을 통해 대학에 입학했다.
고등학교 시절 가장 선호하던 영웅의 퇴장을 그렇게 아쉬워
하며 난 신입생이 되었던 게다.
그리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. 그 설레임 속에서 '바위처
럼'이란 민중가요에 맞춰 율동을 하는 한 선배를 보았다. 여
대생이란 저렇게 아름답구나, 난 첫눈에 매료되었고 대학이
가져올 낭만을 꿈꿨다. 그렇지만 같은 학교, 같은 과, 1년
선배임에도 난, 그녀와 단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하였다.
난 그녀를 알았는데, 그녀는 날 알지 못했다. 난 학교에서
단지 이방인일 뿐이었다.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질 못했
다. 가끔 그 선배를 우연히, 거리에서 봤을 때 난 여전히 설
레임을 느꼈었지만 그녀는 날 의식조차 못했었다. 그렇게 그
녀는 한순간 날 매료시켰다 내 기억에서 사라져갔다.
그리고 또 한 여자를 만났다. 같은 학부, 같은 학년의 참
순수해 보였던 아이. 그 아이가 통계학과에 소속되어있다는
걸 알아내곤 난 통계학과 학회에 가입을 했다. 그리고 첫 술
자리. 처음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중엔 서로 마주
앉았다. 이리저리 이동하며 인사를 나누는 술자리였지만 그
아이도, 나도, 서로 마주앉은 이후론 움직이지 않았다. 띄엄
띄엄 수줍게, 가끔 대화를 나누다 우리 곁에 와 술을 권하는
선배와 한 잔. 그 날 난 생애 최초의 기억상실에 걸리게 된
다. 난 술에 완전히 취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봄에 어울리지
않는 목도리를 두른 채 낯선 승용차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,
이후 들은 얘기로는 그 아이도 술에 취해 내가 택시로 실려
보내진 직후 매우 울었다고 한다.
수줍은 소년, 소녀의 사랑은 그렇게 끝난다.
이후 난 학교에 가지 않았고, 그랬기에 그녀를 볼 수도 없
었다. 그렇지만 그녀를 잊은 건 아니었다. 그 무렵 항상 보
던 '파파'란 드라마 속 음악, Come Vorei를 들을 때면 그녀
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.
이런저런 장난을 좋아하던 그 시절 내겐, 삐삐 비밀번호를
풀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.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의 비
밀번호를 알아냈고, 그녀의 삐삐 음성을 듣게 되었다. 그녀
는 참 인기가 많았다. 그녀를 흠모하는 많은 남성들의 구애
가 그 속에 들어있었다. 그리고... 그리고 그녀가 그 중 한
남자와 만나 영화를 보았다는 음성을 들었다. 그 시절 난,
왜 그 사소한 일에서조차 슬픔을 느꼈었는지... 시간이 흐
른 후 그녀는 삐삐 비밀번호를 바꿨고, 난 다시는 그녀의 음
성을 듣지 않았다.
그리고 2학기가 시작됐다. 난 독립을 하여 학교 근처에 내
집을 마련했고,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. 그리고 엘리베이터
안에서 그녀를 만났다.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와 그녀, 그리
고 용민이 좋아했던 그 아이, 그렇게 셋이 있었지만 그녀도,
나도, 아무도 서로에게 인사를 하진 못했다. 우린 그저 서로
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한 침묵 속에 1층부터 5층까지 올라갔
다. 그 어색한 공기에 시간이 멈춰있는 느낌이었다.
여전히 학교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나는 다시 학교에
가지 않게 되었고, 그녀는 내게서 완전히 멀어져 갔다. 그리
고 1년이 더 흐른 후 난 입대했다.
누군가 내 곁에 있을 때도 가끔 난 그녀 생각을 했다. 밀
폐된 구치소, 그 속에서도 내내 난 그녀 생각을 했다. 그리
고 용기를 내어 입대 전에 그녀를 한 번 만난 채 떠나가고
싶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.
그리고 현재.
내가 다시 학교에 돌아가도 그녀는 없다. 아무리 그녀를
만나보고 싶어해도, 운명이 아니라면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
없다.
그녀의 이름은 전수현. 누구에게나 신입생, 미숙한 사랑의
경험은 있다. 용민에게 혜영이가 있듯이, 성훈에게 효기가
있듯이. 용민과 난 그 수현과 혜영을 '지공킹'이란 은어로
표현했었다. 그 둘은 모두 아름다웠고, 또 항상 같이 다녔기
에 우리 학부 남성들의 모든 인기를 독차지했었다.
가끔 'Come Vorei'나 '가질 수 없는 너'란 옛 노래를 들을
때면 그녀 생각이 난다. 그년 지금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
살고 있을까? 어떤 남자와 사랑을 하고 있을까...
98-9220340 건아처
# 1999년 5월 12일 20:50 조회수 28
이글은 내게 있어서 참으로 대담한 글이다.
난 오랫동안 이 소박한 내 대학 최초의 사랑을
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었다.
참 표현하기 힘들었다.
특히 그녀의 이름을 밝히는 건
지난 시절 내게 있어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.
그렇지만 이제서야, 아주 담담히
편안한 마음으로 Come Vorei를 들으며
그 시절, 가슴 속에 얽매여 있던 얘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.
아마도 그동안 여러모로 성장한 것처럼
사랑에 있어서도 성장했단 단적인 증거이리라...
고백하자면 내게 있어서 짝사랑은 거의 없었다.
오히려 오직 그녀만이 내 유일하고도 확연한 짝사랑의 기억 같다.
만약 그녀를 지금 이 무렵에 만났다면
난 지금처럼 그녀를 홀로 가슴 속에 묻어두지도 않았고,
또 어쩌면 멋진 사랑이 되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.
오랫동안 그녀를 그리워할 것도 같다.
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에...
또 거의 유일한 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기에...
누구에게나 신입생, 미숙한 사랑의 경험은 있다...
하면 할수록 매우 슬프게 되돌아 오는 문구다...
98-9220340 건아처
|